발렌타인데이 유래와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안녕하세요 가루입니다.

내일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인데요


이 발렌타인데이만 기억하는 것이 맞는 걸까요?








발렌타인데이 유래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는 3세기(269년)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의 시대상은 남녀간 결혼을 하기 위해선 황제의 허락 아래 할수가 있었는데

발렌타인은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을 시켜준 죄로 순교한

사제의 이름이 어원입니다. 


그 후 사제가 순교한 이 날을 축일로 정하고 해마다 애인들의 날로 기념하였는데

이날은 여자가 평소 좋아했던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사랑을 고백했던 

매개체가 초콜릿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발렌타인데이가 유입된 경로는 1980년대 일본에서 유입된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때 젊은이들의 욕구를 악용하려는 그릇된 사회현상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지만

지금은 남녀가 특정일을 이용해서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일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지금의 젊은층에서는 2월14일을 발렌타인데이라고만 기억하고

여성이 남자에게 초콜릿 내지는 다른 선물을 하는 날로 많이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2월14일을 발렌타인데이만을 기억하기 보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있게 만드셨던 호국선열 중 한분이셨던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란 것을

알리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본관은 순흥, 아명은 응칠이며 천주교 세레명은 토마스입니다.

의사의 집안은 대대로 해주에서 세거한 전형적인 향반 지주로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 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안태훈과 그의 부인 조 마리아(의사의 어머니인 조 마리아 여사의 성함을 찾지 못하고 세례명인 마리아로 대체함)

여사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인 안태훈은 전통적인 유학자가 아니라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를 지닌 인물로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으며 안중근 의사 역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는데 8세 때부터 조부의 훈도로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도마 안중근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오래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의사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해 반동학군 투쟁에 나서게 되고 의사도 16세의 나이에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이용하였는데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인해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 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면서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에 의해 양곡 반환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이에 신변에 위험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인근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됩니다. 

여기서 프랑스인 빌렘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고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1897년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명을 천주교에 입교시키게 되었으며

빌렘 신부로 부터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 받게 됩니다. 이 토마스란 세례명에서 호를 따 도마로 불리게 된 배경입니다.









의병장 도마 안중근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게 됩니다.

상해에서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 회복을 도모하게 되지만 한인 유력자들과 신부들의 비협조, 1906년 부친의 별세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고 귀국하게 됩니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에 맞서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 독립전쟁에 뛰어들게 됩니다.


1908년 6월 의병부대를 이끌고 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군하는 일분군수비대를 급습,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수비대의 진지를 소탕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고 이어 7월 홍범도 의병부대와 함께 

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게 됩니다.

의병부대원들은 이 포로들을 사살할것을 종용하지만 사로작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는 만국공법과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으로 이 포로들을 풀어주게 되는데

이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원들의 거처가 밝혀지게 되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후 의병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으나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려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에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맏아 활동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1909년 9월 대동공보 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침략의 첫 발을 내듣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라며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 때 대동공보의 사장인 유진율이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어 지원을 하고 대동공보사의 집금회계원인 우덕순과 함께 10월 21일 블라디보스콕을 출할하여 하얼빈으로 향하게 됩니다.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뚫고 역 내의 찻집에서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토는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내에서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40분경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하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고 있을때

안중근 의사가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을 발사하고 혹시 이토를 오인하였을수도 있어

이토와 함께 있던 일본인들을 향해 3발을 더 발사하고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며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당하게 됩니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하게 됩니다.

여기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은 일본인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된 재판입니다.

이에 의사는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인데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며 죽기를 각오하였으며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때 구전으로 전해지는 의사의 모친인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 내용 중 일부의 내용을 발췌하면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란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공소를 포기하고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 마지막 심혈을 쏟게 되는데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며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으로 재판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으며,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하려는 인상을 주기도 싫어

동양평화론을 저술,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으나 일제가 이를 무시하여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사형을 집행함에 따라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을 하게 됩니다.


이후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게 됩니다.





내용이 많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발렌타인데이만 기억할 뿐, 정작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역사적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망각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 발렌타인데이가 일본에서 전파된 이유 중 하나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조금씩 조금씩 잊혀지게 만들기 위해서

동일한 날짜의 발렌타인데이를 한국문화에 전파하였다는 얘기도 나오는데요


이 발렌타인데이를 폄하하는것이 아니라 발렌타인데이인 2월 14일이 지금을 있게 만든 호국선열 중 한분이셨던

안중근 의사의 역사와도 일치된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많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램에 포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웃으며 살자!!

04-29 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