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으로 본 인물 #1. 수양대군




출처 - 영화 관상 홈페이지



지난 9월 11일에 개봉한 영화 관상은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입니다.


물론 필자인 가루도 굉장히 흥미롭게 본 영화이기도 합니다만

역사적 사실이였던 문종과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조선 최고의 관상쟁이와 함께 역사를 바꾸고자 했던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절묘한 조화를 다룬 영화 이기도 합니다.



제 주변에 영화 관상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호불호가 반 정도 갈리는 편인데요

대부분 조선초기의 역사를 어느정도는 아는 분들은

재밌게 보았다는 평을 많이 해 주시는 것 같고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분들은

그저 그렇다는 반응을 많이 보여주시더라구요


하지만 그 모든 분들의 공통된 의견은 있더라구요


이정재 대박!!


영화 관상에서 이정재가 맡았던 역활은

수양대군입니다. 

그럼 이정재가 활약을 했던 수양대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게요






출처 - 영화 관상 홈페이지


수양대군은

영화를 보았거나 조선초시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수양대군이 세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이 죽고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의 7번째 왕이된 세조입니다.


수양대군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는 편입니다.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 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로 평가하는가 하면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군주라는 평가도 있어

어쩌면 역사적 평가에서는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하다

 


쿠데타로 불리기도한 계유정난은 1454년 10월 10일에 발생을 하는데요

단종은 1452년 5월 18일에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오르게 되면 정사를 잘 보살필수 없다 하여 수렴청정하게 되는데

이 또한 여의치 않아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당시의 삼정승이였던

김종서와 황보인등의 원로대신에게 부탁을 하며 사망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구도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던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달리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였으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무예가 뛰어남과 동시에 욕망이 강한 인물로

많은 사병들을 조련하며 무인들과 사냥을 즐기는 인물이었습니다.


단종 즉위 이후 정국은 수양대군을 추종하는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 김종서파로 나뉘게 되는데요

앞서 언급한 1454년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황보인과 김종서를 기습하여 철퇴로 격살하고

계유정난의 쿠데타를 성공하게 됩니다.


이어 군사적, 정치적인 권력을 다 장악하고

가장 높은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를 좌의정으로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게 되며

다음해인 1455년 6월 11일에 반강제적으로 단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7번째 왕이 되는것이지요





 사육신과 생육신



왕위에 올랐다고 하나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많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바로 단종 복위 운동이 가장 대표적인데요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시이애의 난 등 즉위 초반에 불안의 연속이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일어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왕위 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죠

또한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시선들이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정치적인 기반에서 멀어지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레 이뤄지게 되었는데 이 중심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하였으나

이러한 거사는 움직이기도 전에 발각되어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김문기등이

죽음을 당하거나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를 죽음으로서 절개를 지켰다하여 사육신이라 칭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단종에게는 악재로 작용하게 되고 세조의 의해 상왕의 지위로 떨어져 있던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으며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에 파헤져지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사육신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생육신에 의해서인데요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않고 은둔하으로써 항거했던 6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인 남효온이 사육신전을 적어 세상에 유포함으로서 사육신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 6명의 선비는 목숨을 내놓고 저항했던 사육신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이라 하였으며 김시습, 원호, 이명전, 조려, 성담수, 남요온이 그들인데

이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에 발생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이 불발로 끝남과 동시에

세조는 금성대군과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되는데요

금성대군은 세종의 6번째 아들로 세조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세조 사후 그 묘호에 담긴 뜻



왕이 죽으면 왕가의 사당인 종묘에 신주를 모시게 되는데요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때 그 공적을 기리며 이름을 짓게 되는데

그것이 묘호입니다.

태조, 태종, 세종등 역대 왕들의 묘호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국왕의 묘호는 두 글자로 지어지게 됩니다.

첫글자는 임금의 업적을 말하며 두번째는 종법상의 지위를 나타내는되요

예를 들어 나라의 창업자는 태조라는 묘호를 쓰게 됩니다.

조는 주로 창업 개국자에게 주어지는 묘호이고 나머지 후대 왕들은 종자를 쓰게 됩니다.


세조 또한 원 묘호는 신종, 예종, 성종이 거론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라는 묘호는 후대 왕인 예종이 고집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기록이 있는데요

세조는 개국자가 아니라 계승자이므로 조가 아닌 종을 쓰는 것이 맞는 경우이나 

계승을 나타내는 세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 조자를 같이 가진 왕이 된 것이죠

이런 경우는 후대에 선조나 인조가 있는데요 대체로 후대에 무리하게 묘호를 붙인 결과인 것이며

반대로 세조가 그 첫번째 선례가 된 경우이기도 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수양대군인 세조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다음에는 조선초기의 정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한명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이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왕으로 이끈 최고의 참모이자 권세가이기도 한 인물이지요



항상 웃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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